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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소개   HOME  |  약산현황  | 약산소개
신라시대 :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가 완도읍 죽청리에 청해진 설치할 때 최초로 도입
1501년 : 강진군 칠량면에 속함 (고려 공민왕때 추, 강, 양씨가 도입)
1896년 : 완도군 신설로 조약도라 칭하고 행정구역을 16개리로 설치 (고종 33년) : 면사무소는 관산리에 위치
1917년∼1949년 : 고금면과 통합함 → 행정구역은 5개리
1949년 4월 1일 고금면으로부터 분면하여 약산면으로 승격
 
연 혁
삼한시대에는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탐진현(眈津縣)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영암군의 탐진현에 속해 있었으나 1124년 인종왕후(仁宗王后)임씨(任氏의 고향인 정안현(定安縣)을 장흥부(長興府)로 승격시켜 약산도(藥山島)도 역시 장흥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太宗) 17년 1417년에는 탐진현이 도강현(島康縣)과 합하여 강진현(康津縣)으로 통합되어 이때부터 강진현 조약도(康津縣 助藥島)로 480년간 속해오다가 1896년 완도군이 만들어지면서 조약면(助藥面)이 되었고 1914년 3월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금면(古今面)으로 통합되었다가 해방이후 1949년 4월1일 다시 분리되면서 약산면(藥山面)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선조때에는 약산도의 지세(地稅)로 56結45負6束을 국가에 납부하다 이를 정명공주(貞明公主) 관방(官房)에 갖다 바치었고 이에 따라 궁방도장(宮房導掌)에서 관산리(관청리)에 사음감관(舍音監官)을 보내 도봉청을 설치하고 세금을 거두어갔다. 그후 1866년 정명공주 관방을 폐지하고 새로 독진이 된 청산진에 40결을 납부하게 되었고 남은 16결45부6속은 국가(康津縣)에 세금으로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재정정리와 세원개발의 조항에 따라 승총원장(陞總元帳)에 자기 관방(自己官房,정명공주 관방)의 소유로 있다고 하여 목포 정명학교에 매도(賣渡)함으로써 주민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각계에 진정하여 소요(騷擾)를 일으켰다.
 
약산(助藥島)은 1916년 이전만해도 본래 섬 이름 그대로 조약면이었다.
그러다가 1916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조약면이 고금면으로 통합된 이후 '고금면 조약도 또는 조약도 사람'이라고 불리어 왔다.1920년에 개교한 '사설개량서당'을 이어받아 1922년 현대식 학제에 맞춘 학교가 생겼는데 학교명을 조약학교라 하지않고 사립 약산학교라고 했다. 그경위는 옛부터 조약도의 산에는 약재가 많이 있어서 어느 산이든지 '藥山(약의 산)이다'라는 말이 있었기에 助藥과 뜻이 비슷하고 어감이 좋고 부르기 좋은 사립 약산학교라고 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약산이란 말이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고금면에 통합된 이후 일반인들도 조약도 사람과 고금도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경쟁과 견제 의식이 있었는데 특히 약산학교와 고금학교 간에는 운동 경기나 각종행사때에 경쟁이 치열해서 서로 싸우기도 했다.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조약도', '고금도'라는 말 대신  '약산 고금'이란 말이 쓰이게 됨으로써 학교명이 지역명으로 변천되기 시작했다. 1949년 고금면에서 분면될 때 면이름을 약산면이라 한데서부터 본격적으로 약산시대가 된 것이다.
 
조약도 (助藥島)의 수난사(受難史)
조약도는 약 390년전 임진왜란 이후 사재를 출연, 백성들을 모아 개간하여 임금으로부터 내려받은 사패지(賜牌地)로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 관방(官房)의 장토(庄土-왕족이 사유로 관찰하는 논과 밭)로 된 이후 대대로 왕실 장토로 내려 왔음을 추정할 수 있고 조선말기 고종 황제때는 그의 아들 영친왕의 왕실 수라미(數喇米-임금님의 밥짓는 쌀) 장토로 되어 대대로 주민들은 왕실관방에 조세를 바치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일제 침략후 그들은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으로 보낸 다음에는 조약도를 그들의 장토로 삼아 갖은 수탈을 해오더니 한일 합방후에는 고종 황실을 달래기 위해 조약도를 왕실의 관방에 양도하면서 주민 조세로 왕실 경비를 충당토록 했다. 그후 일제는 왕실의 재정을 돕는다는 구실로 왕실장토인 조약도를 숙명여전(숙명여대전신) 재단에 팔아 넘기게 하는 한편 주민들에게는 그때까지 남의 땅에서 토지를 경작하면서 조세만을 내고 살아 왔으니 그속에서 계속 살면서 토지를 경작하려면 땅값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 조치에 주민들이 강경하게 반대하자 일제는 반대하는 주민들을 잡아다가 쇠좆매(숫소의 性器로 만든 매)로 두들겨 패고 그중 주동자 김기주(金其柱), 정영수(鄭永壽), 최무열, 오태선, 윤민형, 강기수 씨 등 10여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주민들은 하는 수 없이 땅값으로 당시 3천 5백냥을 거둬가지고 주민 대표 몇 사람이 털맹이 신고 한양까지 걸가서 총독부에 납부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중 정환중(鄭煥中)씨는 병을 얻어 나주에서 객사하였다.
그 후 군(郡)과 경찰의 주선으로 3만5천원을 10년기한으로 매년 4천원씩 상환토록 하여 그억울함은 형언할 수 없었으나 몇 년간 상환하다가 다행히 해태(海苔,김)생산이 많이 되어 기한전에 전부 상환하였다. 이로서 조약도의 토지분쟁사건은 유상 기한부 상환으로 완전 민유화(民有化)되었다. 이렇게 되어 일본에게 두 번 땅을 빼았겼다. 한 번은 한일합방 때이고 두 번째는 일제가 왕실에서 숙명여전 재단 조약도를 팔아 넘기게 할 때이다.
 
참고 사항
정명공주(貞明公主) : 선조 36년(1603년)에서 숙종 11년(1685년)까지 살았던 선조의 제1공주,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딸로 관방을 두었다가 영조때 연령군(延齡君)이 그 관방을 사용하였다. 청산(靑山)과 소안(所安)이 연령궁 사전(賜田)이 되었으며 1866년부터 정명관방의 사전은 폐지되고 그중 40결(結)을 청산진(靑山鎭)에 납부한 것도 이와 관련이 된다.
관방전(官房田) : 임금이 된 후비(后妃), 왕자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 등의 관방에 소요되는 경비와 죽은 뒤 제사비용을 위하여 하사(下賜)된 땅으로 유토면세(有土免稅)와 무토면세(無土免稅)가 있다. 전국 전답 1,456,000결 중 2.61%인 38,000결이 관방전에 속했다.
- 승총원장(陞總元帳) : 징세에 누락된 전답을 세부(稅簿)에 기록한 원장
- 결부법(結負法) : 조세를 위한 토지면적의 기본으로 토지의 등급에 따라 다르다. 대개 35보(步)를 기준으로 한 면적에서 생산된 량을 1결(結)이라 한다. 생산량으로 볼 때, 1결(목)=100부(負, 짐), 1부(짐)=10속(뭇)=10파(줌)이다. 옛날부터 섬전체에 약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서 조약도(助藥島)라 부르다가 약산(藥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한다. 문헌에는 약산에는 129種의 약초가 있다고 하는데 현재 전시관에 전시된 약초만 하더래도 210여종이 채집되어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약초가 채집되리라고 생각한다. 50여년 전에는 장용산, 망봉산, 너구털산 등 전체의 산에 작약이 만발하여 개화기에는 작약의 꽃으로 장관을 이루었으며 삼지구엽초는 어찌나 많은지 혹 염소가 먹고 자라서 약산흑염소가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유명하다. 봄에 산에 들어가면 향기로운 더덕 내음으로 가득 하였고 미확인된 설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4째 왕자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조약도에서 많은 약초를 채취하여 갔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여 현재 확인 중에 있다.  이와 같이 약초의 자생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산삼까지 캐서 고려 왕실에 바쳤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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